Before I got quitting high school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고 싶다. 나는 억울하게 30년 넘게 이렇게 살아왔는데도 본인들은 게임하듯 해왔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까지 듣게 되면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유일한 목표는 정신병자가 아닌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고 평범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1부 : 시간순서대로 대충 이야기 나는 1969년 12월 서울 출생이라고 한다. 아빠가 육군 장교여서 지방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도 있다. 서울에 있는 새싹유치원에 다니다가, 강원도에 위치한 군인관사에 살게 되면서 협신초등학교에 입학, 초등 2학년에 서울 장위초등학교로 전학, 3학년이 되면서 신생 장곡초등학교로 전학이 아닌 이동 후에 다시 전학하여 석관초등학교에서 졸업했다. 초등 4~6학년까지 내리 같은 담임선생님한테서 배웠다. 내가 이런 처지가 되고 나서 대학 졸업 후에 그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었는데, 초등동창생과 함께 찾아간 나는 많이 실망했었다. 여느 한국사람들처럼 내게 똑같이 대해 주셨다. 국가 비밀 에이젼트라도 되는 것처럼. .. 같이 갔던 초등동창남학생도 비밀을 같이 공유하는 듯이, 그래도 내가 이런 처지가 된 후에 알게 된 사람들에 비해,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훨씬 상대하기 편했었다. 하지만 계속 알고 지내기에는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연락하지 않았다. 중학교는 염광여자중학교로 진학해서 2학년 때 서초중학교로 전학했다. 여기서도 2년 내리 같은 선생님이 담임했었다. 그 담임선생님은 내가 한국에서 매우 힘겹게 지내다가 독일로 출국할 때 공항에서 본 적이 있다. 내가 담배 피우고 있는 벤치 옆에서 역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대번에 누군지 알아봤지만, 출국을 앞둔 내게 쌓여있는 문제들을 생각할 때, 도저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고, 아무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서초중학교로 전학가서 보니 학교 분위기가 예전 중학교랑은 영 딴판이었다. 등교시간, 하교시간, 수업구성, 점심시간 등등 너무나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학교였다. 전학하자마자 성적이 확 떨어졌다가, 수학경시대회 1등을 하고, 담임을 맡았던 수학선생님이 굉장히 좋아했었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굉장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수업을 받았다는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잘 몰랐었던 부분도 나중에 생각해보면, 아 그랬구나 싶게, 동급생들이 뭐라 할 정도로, 굉장히 날 예뻐해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초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실여자고등학교에 입학, 1학년때 담임(국어담당)을 매우 싫어했었다. 그 이유는 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좋아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너무 태만해서 공부를 안 하는데다, 자신이 어설프게 나한테 장난거는 것도 모르고 내가 싫어하는 티를 내는 데도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거의 의무인 것처럼 구는 태도가 결정적으로 싫었다.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였다. 1학년 가을에 학급친구들과 농구 하다가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부당하다고 따지다가, 흐지부지 하루를 끝냈지만… 그러니까, 내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 설명도 없었고, 기합도 좀 받다가 해산했다. 기합을 받은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할 말이 많은데, 마침 그 다음날 오전에 우리에게 기합을 주었던 두 선생님이 교정을 걸어가고 있었고, 2, 3층 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던 나는 그만 욕을 하고 말았다. 커튼 뒤로 숨었지만, 집히는 게 있었던 두 사람은 커튼이 흔들리는 걸 보고 날 찾았노라면서 단숨에 내게 와서는 그 자리에서 뺨을 연속으로 거의 100대쯤 때렸다. 지나가던 수학 선생님이 말려서, 그 두사람은 날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뭔가 물어보았는데, 내 대답에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옆 교실로 데리고 가서 다시 뺨을 아까처럼 때리기 시작했다. 뺨을 때린 사람은 영어담당이고, 옆에서 그러지 말고 몽둥이로 때리자고 거드는 사람은 국어담당이며 내 담임을 맡은 사람의 후배이다. 지금도 분이 하나도 안 풀린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나는 학교에서의 일을 집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담임교사가 집에 전화해서 알려놓았었다. 맞고 울어서 부은 얼굴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서 집에 도착하니… 나의 부모님이 학교에 방문하여 무마되었다. 근신처분이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내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내게 뭘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억울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고 그렇게 좋게 마무리되었다. 특히 나한테 내내 거절당하던 담임교사도 매우 만족스러운 듯. 좀 나중에 안 사실인데, 부모님이 교무실에 난로를 설치해줬다고 하셨다. 부모님이 학교다니기 불편하면 전학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진짜 좋게 마무리된 줄 알고…. 2학년이 되어,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대체로, 지나친 관심이었다. 좀 지나니까, 거의 모든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나에 대해 한마디 이상씩 하고 있었다. 물론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과 시선을 던지면서. 그러면서 그들은 내게 점점 적대적으로 굴었다. 점점 학교 다니기가 싫어지고, 교사들과 수업중에 서로 미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쉬는 시간에는 그야말로 조용히 쉬는 것 밖에 못하고, 학교 성적도 떨어지고, 새 친구도 사귈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 집을 나와 독립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집에 내 거처를 알리지 않고 내가 벌어 살면서, 집으로부터 더 이상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복수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휘둘리며 간섭받지 않을 나이가 되면 꼭 그렇게 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대로 고교를 다니다가는 대학 진학에 매우 차질이 생길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퇴했다. 아주 힘들게 자퇴했다. 부모님도 말렸지만, 교사들도 거의 원망의 눈길을 보내며 말리면서 협박도 했다. 검정고시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 담임을 맡았던 지구과학 담당교사는 복도에서 나에게 너 정신병걸린 것 아니냐는 요지의 말을 매우 크게 교실 안의 동급생들이 다 듣도록 떠벌이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많은 말로 괴로움을 주고, 내가 자퇴할 때도 가장 원망하는 표정을 보인 사람은 수학선생이었다. 그리고 수학은 내가 제일 편안해하고 잘하는 과목이다. 부모님도 매우 황당한 듯 했지만, 자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사고를 또 쳐서라도 자퇴를 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1년이나 그런 꼴을 하고 학교를 다녔나 싶은게 스스로 측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당시에 고교생의 자퇴는 막장인생으로 끝나기 위한 첫걸음이나 다름없었다. 요즘이나 사교육에, 유리한 내신 등을 생각해서 자퇴하지, 감히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선택이다. 고교 때 이후 가끔씩 생각하고 싶은 선생님이 두 분 계시다. 1학년때 윤리담당이었는데, 2학년에는 날 가르치지 않았지만, 학교 방송 같은 걸 통해서 내가 직접 접하고 있는 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하셨다. 또 한분은 아마도 지금 고인이 되셨겠지만, 교감선생님이다. 난 그 성함도 잘 모르지만, 내가 학교 그만두던 날 아침에도 연신 얼굴에 예뻐 죽겠다는 표정을 하시고는 잘 가라고 하셨다. 자퇴를 하고 약 1년간 공부해서 대학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부모님과의 마찰이 심했다. 특히 사정을 너무 모르는 엄마는 가만있지를 못하고, 나에게 심리상담소에 가자고 졸랐다. 매우 비전문가 같은 상담사와도 별로 소득이 없이, 엄마는 계속 안달복달하고, 서로 마찰하다가, 정신과 면담까지 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밤에 거실에 나와서 물건을 마구 부순 사건 때문이다. 낮에 감시하며 참견하는 것도 참기 힘든데 잠들기 전에도 계속 참견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장치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이후에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정신과 진료 최고 권위자라고 아빠 친구가 추천해준 이병윤 과장을 만나기 위해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한밤중에 응급방문하여, 이병윤 과장이 부재중이라서, 그 다음날 이민수 과장에게 약 1~2시간 동안 초진 후, 정신과 입원 판정 받고 입원하게 되었다. 정신과입원을 위한 상담 이후의 상담내용은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더 이상 내게 대한 질문도 없고, 그냥 정신과 약 먹고, 부작용이 어떤가 정도의 이야기들이 다이다. 그러는 동안 이민수 과장의 추태를 보며, 레지던트들의 잘못된 행동과 말 등을 겪으며 그렇게 정신병 환자로서의 낙인이 선명하게 찍히가기 시작했다. 입원의 반복되어 갈수록, 이 민수 과장은 자신이 오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서 반드시 문제요소를 만들어야 겠다는 듯이 굴었다. 담당 레지던트들은 그런 이민수의 의지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아마도 대학병원이라 더 그런 것 같다. 후에, 내가 상담했던 레지던트들이 대학병원에서 의대교수 등 한자리씩들 차지하면서 확고한 이민수 체계가 잡혀가는 것처럼 보였다. 직접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상담하지 않았다. 내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자기들이 판정내린 정신병 증상 관련해서도 묻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집과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여러 사람들과 마찰을 빚었고, 담당의사들은 그 문제들에 대해서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식이었다. 내가 그 점에 대해서 그들에게 지적하면, 그들은 점점 비난의 대상을 바꿔나가면서, 재판관 행세를 하려 들었다. 본인들의 잘못을 내게 투사하며, 본인들의 책임 회피를 위해 나를 비난하다가 우리 가족을 비난하기를 번갈아 했다. 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빠는 편집증 환자 수준이며, 나와 계속 마찰하고 있는 엄마에 대해서는 묵묵, 내 형제들은 굉장히 경쟁적이며 ..., 뭐, 그래서 집안 내력이라는 식인 것이다. 이래 저래 자신들은 아무 잘못 없는 책임회피의 일관이며, 엄마와의 마찰이 계속되는 걸 방관하며 조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투약 이외에 정신병적인 처치와 거의 상관이 없음에도 내 병명에 증상만 계속 추가해 갔다. 아마도 일처리가 쉬웠으리라 생각된다. 가만보면, 자신들은 정신과 의사들임에도 구체적인 인간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힘든 모양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이 피해망상, 과대망상, 환청, 색정망상, 관계망상 등의 용어로 대체해 이야기하는 걸 선호한다. 언어 사용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의 감상이나 남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사람들인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서 고대 의대를 거쳐 대학부속병원에서 근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공부에 매달렸을지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렇다고 하면 최소한 정신과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다. 신분상승의지와 경쟁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면 정말로 정신과의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 대학부속병원이라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설과 서비스에도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매번 지불해야 했고, 매번 신약을 투여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약값도 고가이지만, 갖가지 부작용을 다 겪어야 했었다. 내가 겪은 부작용에 대해 일반사람들에게 아무리 잘 설명해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긴 정신과 의사들도 그 부작용에는 이런 약을 써야한다는 건 알아도, 그 부작용 때문에 얼마나 힘들까하는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때로는 '생명 포기 각서'를 부모님으로부터 받고 시험적 투약도 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제약사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기회가 된다. 공짜 홍보 기회이자 공짜 인간대상 실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면 그 제약사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거대 제약사라서 돈에만 반응할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책임에도 크게 반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의사들의 서양의학에 대한 맹종을 보고 또 한번 실망했다. 최신 서양의학에 의하면 사람이란 화학물질에 의한 과정일 뿐이라서, 약으로 모든 정신활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약 용량의 정확한 계량으로 타인의 정신조절의 강도를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이다. 이런 일련의 국가적 망신 사태가 대학법인차원의 지지 없이 진행될 수는 없어 보인다. 거기에 아무리 한국에서 잘 나가는 대학이라해도 이런 일을 꿋꿋이 20년 넘게 해내려면, 정부 지원이 없으면 무리일 것이다.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나는 그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대학입시를 두번 놓치고 건국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처음 치르기로 되어 있던 대학입시는 정신병원 때문에 치를 수가 없었지만, 그 시험에는 수학 과목에서 내가 배우지 않고 자퇴했던 내용이 30% 이상 출제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시스템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약속받은대로 유학가기를 희망했지만, 내가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학력이 중졸이 된다고 설득하며 반대하는 바람에 울며겨자먹기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 입학해서는 수업받기가 거북했다. 내가 고교 2학년 새로 시작할 때랑 다른 게 별로 없지 않은가. 문제만 커지고 관련된 사람 수만 더 늘어났을 뿐. 그 말은 ,나를 소외시킨 채, 참견할 사람만 더 늘었다는 뜻과 비슷하다. 그래도 처음에는 교수님들이 매우 배려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짜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늦게 진학해서 동급생들과 나이차가 두 살이나 나서, 호칭 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특히나 연배를 중시하는 동양적 문화에서 나도 어린애들한테 반말 듣기가 싫고, 동급생들도 함부로 반말하기 힘들어했다. 한술 더 떠 선배들까지 나서서 이래야하고 저래야 자기들이 편안하다는 둥, 압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늦게 입학했다는 이유로 동급생들과 천편일률로 반말을 터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나보다 일찍 입학했다는 이유로 선배들을 언니,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입학시스템에 밀려서 나와 같은 나이에 입학한 동갑내기들과는 그래도 좀 말하기가 편했다. 그러다가 복학생도 좀 생기고 하면서, 웃기지도 않게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내용은 나도 잘 설명하기가 힘들다. 아무도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한 적이 없는데, 군대 갔다가 복학한 한 남학생이 동급생 거의 전부를 자기 부하처럼 부리며 나를 왕따로 만들고 있었다. 하도 답답한 내가 그 복학생을 카페로 불러서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가뜩이나 정신병원 다니며 집에서도 마찰이 심해서 한국에서 빨리 떠나고 싶은데다 이 복학생은 처음엔 좀 친한듯 하다가 이렇게 돌변해버리니 나로서는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생활이 된 것이다. 이 대학교에서의 문제에 대해서 고대 정신과 의사들의 주장은 나의 피해망상이며, 과대망상에, 색정망상이라는 것이다. 너의 편집증 때문에 그 문제에 더 집착하는 것이니, 온통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과 의사들은 나와 의사소통할 때 꼭 정신과 환자처럼 한다. 나한테 말로 하는 내용과 나한테 진짜 요구하는 내용에 많은 차이를 담고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효과가 의심스러운 약 이외에 내게 주는 조언이라고는 ‘혼자 피해망상으로 끙끙 앓지 말고, 타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럼 오해가 풀릴거라는 주장인데, 사실 나는 학교에서 주변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내 얘기를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학교에서 내가 마주치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겁에 질려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왕따를 당하고 있기는 해도 나랑 굉장히 사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뿐더러, 아이스브레이킹이 너무 어려워서 쭈뼛거리다가 저만치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인정하고 내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자기를 드러내고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내지 못하는 거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상대방이 거부당했다고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건 고등학교 때 자퇴까지 하게 된 경위와 비슷하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거의 매년 입원해서 말도 안되는 주장과 대우를 받으며 약에 취해 힘겹게 생활하다가, 입원기간이 길어져 휴학하게 되었다. 엄마와는 특히 심한 마찰로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한몸에 다 받아야 했고, 집에서는 사이가 좋았던 동생과도 점점 멀어졌고, 오빠는 원래 별로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으며, 여러 정황이 계모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부모님은 방학때마다, 또 휴학기간에 해외에 여행다니며 어학연수도 하게 해주셨다. 해외에서 좀 지내다 오면 상태가 굉장히 좋아진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복학 후, 독어 교양수업에 회화반이 개설되어 수강했다. 대학 입학 초기부터 유학하겠다고 밝히고 다니고 있었는데, 건대 물리학과에는 유독 독일유학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내게도 독일유학을 권해서 그러기로 마음먹고 1학년 때부터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영어랑 달리 학원도 별로 없어서 종로까지 독어 배우러 다녔고, 정말 어려웠다. 회화는 더 어려워서 투자시간 대비 좌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교수님은 독어를 가르치러 한국에 와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재빨리 나꿔채야 할 것 같은, 하지만 이래 저래 지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고대 정신과 의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사병’이라고 진단했다. 내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입원 사유는 두 가지다. 엄마를 계모라 하는 것과 독일 남자에 대한 상사병. 고대 병원에는 방문하면 거의 자동으로 입원이 된다. 상담도 거치지 않고 거의 악의적으로 가두는 느낌이 된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고 해도 병원측은 할 필요가 없다고 극구 거절. 병원 측에서 먼저 요양시설 같은 데서 지내보면 어떻겠나고 제안해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또 거절. 그러다가 약 3년 만에 자퇴했다가 재입학, 같은과에서는 여전히 서먹, 예전의 그 복학생도 자퇴했다는 소식을 예전에 연배가 같아서 좀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에게서 들었는데, 걔 말이 내가 자퇴하기 전에 자퇴했다나… 마치 내가 자퇴해서 그 복학생이 자퇴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 문제에 대한 고대 정신과의 진단은 ‘색정망상’이다. 그 용어의 뜻을 물어보니, 세상 남자들이 다 본인을 사랑한다고 느끼는 망상이라나… 내가 후에 다른 의사에게서 들은 색정망상은 그게 아니던데. 대학 생활도 고교때와 별다를 것 없이, 교수들에게도 미움받아 고지사항을 놓쳐서 시험을 못치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7년 걸려서 겨우 겨우 학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가기 위해 정말 애썼는데, 추천장도 써주는 걸 거부했다. 물리학은, 나로서는 좀 쉽게 공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선택했고, 입학 후에는 물리학의 내용이 내가 처한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대학에서 새로이 습득한 물리에 관한 지식은 없었다. 그건 결정적으로 정신과 약 때문이다. 고대 정신과 의사들은 약을 먹으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나같이 머리가 좋은 사람은 확실히 두뇌기능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다는 걸 느낄 수 밖에 없다. 또 그들이 영양제처럼 생각하고 먹으라는 약은 그 기능이 전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과 약은 거의 모든 정신기능과 신체기능에 마비를 가져다 준다. 결과적으로 비만해지고 삭막한 정서가 된다. 풀어서 말하면,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영양상태가 엉망이 되면서 이도 약해지고 피부도 나빠지고 인상도 정신과 특유의 경직된, 정신과에서는 패턴이라 할 만한 인상이 되며 운동기능도 떨어지고 이상식욕이 생기면서 비만과 당뇨가 온다. 정서적으로는 삭막해져 슬퍼도 울기 힘들고 웃을 일에도 웃기 힘들고 말도 어눌해지고 하기 싫어지며 만사 귀찮고 항상 처지고 졸린 느낌에 일상생활이 매우 힘겨워지므로 타인과의 교제는 거의 불가능하다. 휴학, 자퇴와 재입학을 거치면서 7년만에 졸업하니, 부모님이 갖가지 이유로 유학 반대하셨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스토커들은 주제넘게도 무언가를 변호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제야 인간적인 감정이 마구 솟구치기라도 하는 듯, 그러나 아무도 그 뒤에서 변호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딱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얼마전에 자신의 아들을 이 스토커 무리에 끼워 큰 이득을 본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의 주제넘은 위선은 그만두고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지라고 하고 싶다. 본인의 직위에서 책임질 일이 넘쳐나는 상황이지만, 내가 요구하는 건, 그런 거창한 사회적 책임이 아니다. 대학 졸업학년때 왕따당하느라 정보부족으로 취업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일정이 생긴 LG에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누군가는 왜 영어보다 독어를 더 열심히 하지 않느냐든가, 영어 하나 먼저 제대로 해라 든가 라면서 참견을 하지만, 사정을 전혀 모르는 주제넘은 참견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영어 공식인증시험을 믿을 수가 없다. 얼마전에 나는 운전면허를 반납해야만 했다. 대학 1학년 때 8번 탈락하고 받은 면허인데,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많은 탈락을 겪어본 적이 없다. 일반 시험도 잘 치르는 편이지만, 실기시험은 더 잘 치르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뉴욕에 여행갔을 때도 운전면허 시험에 탈락했다. 그 뉴욕의 시험 채점자는 약간 자신감이 없는 듯하지만 나름 예쁘게 멋을 내고 서 있는 내 옆의 한국여자 지원자에게는 너무나 운전면허를 내주고 싶은데 실력이 안되는 것 같았고, 나는 두번 채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꼴이 아니라서 미워 죽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후에 내 영어실력은 공인점수도 없이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은 채, 내게 굉장히 많은 이점을 주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의 목적과는 약간 방향이 다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그 후, 아빠가 독립 사업을 하시는데, 도우면서 배우기로 하고, 무역회사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직접 정관도 만들고 서류 구성해서 무기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사장이 되었다. 취급품목이 무기이다 보니 거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S/W사업을 하시는 분의 영향으로 서울의 유명한 학원에 등록했으나, 중도포기해야 했다. 수업내용이 벅차다는 것이 내 이유이지만, 학업분위기가 정말 나빴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원생들은 대학때나 다름없이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똘똘 뭉친 것 같았다. 가뜩이나 수업 내용도 벅차다고 느끼고 있는데, 주변학생들은 도움을 주고받을 마음의 여유도 없어 보였고, 서로 돋보이겠다는 의지로 꽉 찬 그야말로 아귀다툼의 현장 같았다. 정말 아쉽지만 포기했다. 또 의대에 다시 도전했었는데 삼육대학교에서 또 탈락했다. 면접에서도 아주 맘에 안들었지만, 정작 탈락 이유에 대해서는 성적이나 면접이 아닌 것 같은 언질을 고대 정신과 의사중 한명에게서 들었다. 만약 이런 부당한 탈락을 당한다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 내가 이렇게 부당한 상황에 처한 이후, 너무나 많은 노력이 허사가 되었고, 그런 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 그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다. 회사에서 시간이 남아도는 나는 이런 저런 궁리중에 나이지리아로부터의 무기구매건을 접하게 되었고 대금결제받을 일이 생겼다. 나이지리아 발 무역사기가 판을 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거래는 시작이 달랐고, 진행과정에서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대금결제를 받으러 나이지리아로 오라고 했지만, 아빠의 조언을 듣고, 무기를 공급받고 싶으면 대금결제를 회사 계좌로 당신이 책임지고 해야한다고 우겼다. 그러고 나서부터 일이 꼬여버렸다. 나는 대금결제를 받기 위해 영국, 말레이지아, 베넹, 벨기에, 네덜란드 등을 헤매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빠가 사망하시고, 내게는 약간 해방감이 왔지만 잠시였다. 내가 알던 한 목사는 내가 표정이 편안해졌다면서 나를 두둔하는 듯 했지만, 이건 완전히 위선이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는 아빠 편에서 모든 판단을 하던 사람들이, 아빠가 사망하고 나니 모든 비난이 그리로 쏠리는 듯 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여전히 마찰 투성이인데, 특히 가족간의 마찰이 여전했고 엄마는 내가 사업이든 공부든 거의 모든 것을 하지 않기를 바랬다. 엄마는 나를 입원시키는 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행동했고, 아빠 사망 후에 더욱 심해졌다. 대학졸업후에도 계속 고대 정신과에 입원이 반복되다가, 아빠 사망후, 용인정신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용인정신병원에 처음 입원하기 위해, 우선 구급차를 부르는 데서부터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나구급’에서 맡아서 나를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여러 곳을 전전했다. 거의 마지막 단계에 용인정신병원에서 입원절차를 하게 되었다. 상담의사는 ‘이용석’ 전문의인데, 아마도 고려대학교 의대출신인 것 같다. 상당히 뚱뚱한 몸으로 걸어다니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그 의사는 틈틈히 비만예방에 관한 강의를 한다고 했다. 또 당시의 병원장도 고대 의대출신이었다. 무슨 사명감에 일하는 사람들처럼 이런 저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이 오간 후에 6개월간 입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정말로 구질구질해서 입에 담고 싶지가 않다. 엄마는 내 입원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동안 병원측에서 주장해온 말 중에서 입원시에 효과를 발휘하는 말들을 모아, 환청이니 자신을 계모라 한다면서 망상이니, 내 말이 수미상관이 안 된다는 둥 하는 말들을 읊어댔고, 담당의는 그 말을 그대로 수용하며 순순히 절차를 밟았다. 그 후 나는 3번 더 입원했고 그 때마다 6개월씩 갇혀있었다. 병원 시설은 고대부속병원보다 훨씬 나아서, 한 방에 6명이 아닌 3명 수용, 하루에 두 번씩 산책시간, 상담을 하는 의사들이 레지던트가 아닌 전문의라는 점 등에서도 탁월하지만, 고대부속병원보다 약 용량을 훨씬 적게 써서 부작용이 훨씬 덜하고 실험대상이 되었다는 느낌도 훨씬 덜 들었으며, 무엇보다도 병원비는 비교도 안되게 저렴했다. 게다가 입원기간이 3개월 이상되는 걸 싫어하는 대학 병원에 비해 평균 입원기간이 길어 안정적인 요양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긴 입원기간이 싫지만, 일반적인 정신병원으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용인정신병원에는 환자 스펙트럼이 훨씬 다양했다. 이래 저래 고대 정신과 병동은 진짜로 형편없는 병동이다. 가격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사기단체나 다름없다. 나는 이 병원에서 특히 병원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의사의 환자들은 일관된 특징이 있는데, 대체로 증상이 경미해서 의사의 조언을 잘 따르며 그래서 꾸준한 치료를 받아오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과 의사로서 편안한 돈벌이가 가능한 환자들인 것처럼 보인다. 가식과 꼼수를 잘 포장해서 사회적 명망과 부를 쌓아가는 부류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다른 병원에서 부원장으로 일한다고 한다. 이 병원에서도 나는 여전히 상사병에 걸린 편집증적 정신분열환자이다. 요즘은 조현병이라고 한다나.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정신병원을 정기방문해야하는 정부공식등록 정신장애 3급 장애자이다. 나는 아직도 내 병명과 증상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타당한 판단 근거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겪어온 말도 안 되는 불법행위와 패륜행위가 버젓이 30년 넘게 지속되는 것은 아무래도 정권차원의 비호와 압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또 해외에서 겪은 일들도 잘 생각해보면 국내 정권의 법 테두리 밖에 내동댕이쳐진 내가 겪기엔 도가 지나치다. 뭔가 이상한 점이 많아서 지금 이 상황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면, 나도 망하고 그런 불법적인 인권유린상황은 한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일상 다반사가 될 것이다. 한국의 역대대통령중에 현재 살아있는 이는 전두환씨, 노태우씨가 있고, 김영삼씨 사망, 요즘 거리에 ‘평화의 꽃’이라고 플래카드에 적힌 김대중씨도 사망, 노무현씨 자살, 이명박씨, 박근혜씨 수감, 현 대통령인 문재인씨가 있다. 내가 이런 불법적인 상황에 빠진 이후에 보아온 역대대통령들이다. 정치 사회적인 비판을 하려면, 한참 더 쓸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을 하고, 아무래도 일관성 있는 마무리들은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숙한 정치인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내가 여기에 이름을 나열한 이유는 이 불법적인 상황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 위함이다. 내가 이렇게 처절한 노력을 하면서 사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아왔다. 아마도 내가 그동안 겪은 사람들 중에도 있으리라고 예상되지만,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내게 가한 자신들의 행동이 너무 미안해서 자살할 정도라면, 그렇게 사과 한마디 없이 그냥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나는 유전자 검사를 한국에서 3회(휴먼패스 법원제출용), 해외에서 2회(NIMBL diagnostics, Genex diagnostics) 하여 모두 동일한 결과를 받았다. 친모인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청구를 위해 FEDEX로 서신을 발송한 적이 있는데, 배달사고인지, 그 기관의 고위직원중 한 명이 ‘송상현’이라는 한국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국제사회의 방관인지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다.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기에는 내가 너무 많은 명백히 불법인 일을 오랫동안 당해왔고, 그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나로서는 기억의 오류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나에 대한 지속적이고 집요한 관심이 왜 점점 더 심해지는지 매우 궁금하다. 분명히 밝히는데, 아무리 관심폭발이라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지금 이대로 이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그런 관심을 끄든지, 상황설명을 제대로 하고 원하는 것을 말하든지 할 수밖에 없다. 계속 내가 한국국적으로서 한국법의 테두리밖에 내동댕이쳐진 매우 열악한 상황인 것을 빌미로 헐값으로 이득을 얻고자 하는 꼬락서니에 나는 화가 나는 게 당연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쉬는 공간에서 하게 되는 비난의 말에 그 누군가는 계속 열받아 반 미치광이처럼 되는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인 분노폭발로 하는 비난은 그 누군가만이 듣는 게 아니므로 본인은 공개적인 비난이라고 착각할 지 모르지만, 전혀 아니다. 당신 혼자만 정신나간 것이다. 몰래 엿들은 말로 공개적으로 미치는 중이다. 나는 해외에서 비롯된 나를 타겟으로하는 불법행위들의 유력한 용의자로 일루미나티를 꼽고 있다. 확신하려면 증거가 필요하고 그래서 이 글을 써서 배포하는 것이다. 일루미나티는 내 말을 잘 새겨 마음속으로 음미해봐야 한다. 최고 상층 한두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원들은 가까운 미래에 나와 별반 다를바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편안한 생활을 위해 뭔가를 포기하든가,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일루미나티와 결별하든가 선택해야만 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최고 상층의 한 두명의 운명은 아마도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은 성경에 나와있다. 지금은 일루미나티에 속해 있어 우아하고 선택받은 세련된 느낌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다. 일루미나티는 냉소적이다고 할 만큼 지적이고 싶고, 남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고, 부유함이 넘쳐 너그럽고 천사처럼 선량하고 정의로우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파워를 가지고도 이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은, 알량한 심리를 가진 사람들을 기만하는 단체이다. 조물주가 만들어낸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 누구나 스스로 판단해서 자신의 운명을 창조해나가야 하고, 그런 일련의 생활은 아무에게도 위탁하면 안된다. 요즘에는 편리함, 부유함, 인공지능비서 등등에 우리의 많은 것을 위탁하라는 광고가 넘치고 있지만, 사람이라면 살아가는데 당연한 불편함이 있고, 모자람도 있으며, 모르는 부분도 많아서 타인과 함께 보충하면서 또는 스스로 만족하면서 느끼는 삶의 환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데 다 위탁해놓고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삶에서 무엇을 느끼며 살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이렇게 열악한 법적 상황에 있기 때문에, 나는 돈이 더 필요하다. 소송도 해야하고 증거자료도 모아야 하고 불법행위 때문에 돈이 줄줄 새나가기도 한다. 무기 판매 대금결제를 현지에 직접 가서 받지 않기로 해서, 구매자측에서 대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영국, 말레이지아, 베넹, 벨기에, 네덜란드 등으로 출장을 다녀야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대학때 배낭여행으로 다녀온 후 오랜만에 간 거였다. 내가 거기서 누굴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하는 곳에도 잠시 들렀다. 남들이 다 지켜보는 걸 알아도 눈물이 줄줄 흐르지만, 계속 울고만 있을 수도 없어 또 다 잊은 듯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영국사람들은 내가 기억을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자꾸 일깨워 주고 싶어 했다. 내가 그럴리가 있겠는가. 하여튼 대금결제는 실패했다. 그쪽 무역대금 결제방식이 약간 비상식적인 건지, 아니면 현지에서 받는 걸 거부해서 그렇게 된건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결제대금을 받기 전에 얼마를 지불하라고 요청한다. 무역사기사건의 전형인 것 같지만, 이런 행태는 그쪽 지방 특유의 문화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적으로 무역사기라고 하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데가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지아에도 갔었다. 전달자인 흑인은 영락없는 사기꾼이었다. 무역협회싸이트에서도 유명한 수법으로 날 등쳐먹는 걸 다 지켜봤다. 내가 묵었던 호텔에 대해 말인데 아무리 특급호텔은 아니라도, 문이 두 개인 객실에 한쪽 문은 자물쇠가 달려 제기능을 하는데 다른 쪽 문은 자유롭게 열리는 거였다. 누가 보면, 문단속도 안하고 허술하게 다닌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걸 내가 안전하다는 신호로서 인식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지금 그곳에 와 있는 것인지 완전히 이해한다라고 내게 알려주는 것처럼 나는 느꼈다. 한국에서처럼 나는 어딜가나 다 공개되어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라면 나는 그렇게 인식할 수 없다. 베넹에도 갔다. 만나봐야 할 사람이 두, 세 사람이나 되었고,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는 겁이 나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름도 생소한 무기구매자의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다. 한국에서 직항편도 없어서 프랑스로 먼저 가야했다. 일정이 좀 여유가 있어서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돌담 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이번에는 블랙이냐?’고 하면서 지나갔다. 불어로 말했으면 못 알아들었을 거고 한국말로 한 것도 아니니 영어로 말했나 보다. 하여간 그런 의미로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거기에 나밖에 없으니, 나한테 한 말인 거고, 한국에서는 한국말로도 나한테 그런 말을 감히 하는 사람이 없는데, 뭔가 숨기려는 태도는 전혀 없이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에 홀딱 반하는 중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해서야 황열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개인병원을 거쳐 약국에 물어 물어 접종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갔다. 접종 후 확인서를 교부해 줄 때, 병원 직원들이 내 생년월일을 잘 못 적어넣었는데, 고의가 아닌 것 같았다. 거의 일년정도 지나서야 생각이 나서 그 접종증명서를 찾아봤는데, 도난당했다. 길에서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한게 아니라, 집에 보관해놓은 걸 누가 가져간 것이다. 그 잘못 적힌 생년월일위에 내가 정정해준 대로 고쳐썼으니 내가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없어진 것이다. 거기에 실수인 척 적어넣었던 게 내 실제 생년월일인 것 같다. 발생 당시에 바로 바로 눈치채는 게 힘들다. 한 번 겪어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빨라도 모든 정보가 동시에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컴퓨터는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얼마전에 프랑스에 난민신청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베넹에서는 한 눈에 딱 봐도 사기꾼처럼 보이는 한 명을 만났고, 진짜로 진지해 보이는 대금결제당사자의 변호사도 만났다. 사실 이번에는 그 결제건으로 방문한 건 아니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다시 프랑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야했다. 나로서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행은 매번 힘빠지는 매우 불쾌한 여행이다. 벨기에에도 돈 받으러 가서 한 흑인을 만나, 어찌 저찌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벨기에에서 분위기가 엄청나게 쌀쌀맞다고 느꼈다. 네덜란드에도 가야 했었다. 그런데 여행할 돈이 없어서 끌어들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대금결제가 성공하면 살인계획도 세워놓았던 것 같다. 내가 대금이 보관되어 있다는 창고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는데 그곳이 벨기에인지 네덜란드 인지 잘 모르겠다. 구경을 시켜주는 그 흑인은 내가 그 장소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보여주면서 본인은 이코노미스트라고 했다. 이제는 결제대금이 어디에 보관되어있는지 모두다 확인했고, 나에게 주기만 하면 된다. 세금 약 45% 떼고 돌려줄 것 같이 나는 이해했는데, 은행에 넣어 놓았으면 이자도 상당할 거고, 내가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 이미 독일에 가 있을텐데. 이런 저런 시도 끝에, 나는 프랑스에 난민신청을 하기로 했고, 한국이 넌덜머리가 난 나는 비행기표도 없이 공항으로 갔다. 한국인 직원에게 비행기표를 문의해보니 날짜가 맞지 않아 독일행을 문의해 봤더니 삼백만원이라고 했다. 하루 공항에서 보내기로 하고 일본경유, 스위스경유 프랑스행 비행기표를 겨우 샀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공항에서의 하루였다. 낮에는 한 남자애랑 크게 다퉜는데, 꼭 정치인 남경필 아들처럼 생겼다. 저녁에는 또 다른 남자애 때문에 잠도 자기 힘들어 꼬박 밤을 새웠다. 어느 집 자식인지 버르장머리도 없고 밝히기는 왜 그렇게 밝히는지. 일본에 도착해서도 하룻밤을 보내야 했는데, 나에 대한 공항분위기가 가관이었다. 일본항공으로 스위스로 향하는 기내에서는 일본인 승무원의 특별히 준비한 허접서비스를 받으며, 스위스에 도착, 비행기를 갈아타려는데 참 희한하게도 입국심사 비슷하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다. 특히 현금이 없이 간 나에게 꼬치꼬치 묻길래 사실은 난민신청하러 프랑스에 가는 중인데, 스위스에서도 가능하다면 여기서 신청할 수도 있다고 했더니, 아마도 본인들이 난민신청을 받으려고 했나보다. 난민 신청을 회피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열렬히 받고 싶어하는 열망을 억지로 숨기며 우기면서 접수하는 우스꽝스럽지만 어떤 이득이 있을까 희망에 찬, 기대에 부푼, 야심찬 접수 같았다. 스위스에서 1달간 공항에서 갇혀 지내면서 많은 모욕적이고, 부당하고, 억지스러운 일들을 겪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꼴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니, 그야말로 지상에 실현된 지옥이었다. 너무나 오만한 사람들틈에서 한달동안 고생하다가 난민신청이 거부되어 추방되었다. 그 사람들 주장은 Schengen을 대표해서 추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2022년까지 그 지역에 난민신청은 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달이나 심사한다고 잡아놓고, 추방이유는 어이없는 것이었다. 내가 취리히 공항을 떠날 때 난쟁이 직원이 내게 트위터를 하겠냐고 선심쓰듯 물어보았다. 정말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공항에서는 내가 다 들리도록 ‘우리는 무책임한 한국과 달리 pay한다’ 라고 큰소리치는 소리도 들렸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아직 미안해하는 낌새도 없다.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 말은 TV나 신문에서 연일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창 이슈가 되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유엔난민기구, 법무법인 등에 전화도 해보고, 여러가지로 알아봤지만 소송걸 여건이 안돼었다. 모두들 횡설수설하며 거절하고 외면했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법의 테두리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국가적인 자존심도 없는 사람들인가 보다. 스위스에서 돌아온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과 한마디는 커녕 제대로 된 위로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대신, 국제적인 이런 저런 불행한 사건들을 들어 내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나 보다. 오늘은 미얀마의 로힝야족의 비극에 대해 크게 보도하면서, 휴머니티에 대한 논평이 가해졌다. 아웅산 수치여사의 positive한 이미지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이런 저런 이야기인데, 수치여사의 positive한 이미지와는 별도로 실제로 현장에서 고생한 사람은 수치여사뿐이지 않은가. 그런 이미지를 주면서 생색내고 립서비스하며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이 지금 휴머니티가 어쩌고 하면서 비난하고 하녀라도 부리듯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말할 자격이 되는가. 자신들이 상 주고 칭찬과 지지를 보낸 것이, 개도국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positive한 역할을 하도록 임명장이라도 준 줄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positive한 역할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면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처럼 선진적이고 민주적이고 우아한 나라로 변모하기를 바라나 보다. 좀 더 따져보자면, 돈이라면 눈이 뒤집힐 것처럼 남의 나라 침공하여 살인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왜 지금 비극적인 인간사에 그토록 마음아프다는 표현을 해가면서도 돈을 위해 행동할 때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은가 매우 괴상하게까지 생각된다.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 San Diego였다. 두번째 미국여행때는 6개월짜리 어학연수였다. New York에서 카드점을 쳤었는데 나에게 지금 그 사람을 꽉 잡으라고 했다. Jeff라는 이름의 남자도 기차에서 마주쳤다. Miami의 서점에서 점원이 ‘너처럼 생긴 사람도 책 사냐?’는 듯한 투였다. Seattle 에서는 캐나다가 가까워서 밴쿠버나 빅토리아로 여행을 다녔었다. 캐나다에서도 나는 홀딱 반할 일을 겪었었다. 세번째 미국행은 New York이었는데, 마침 Pace Univ. 라는 곳에서 입학신청서식을 보냈길래, 내 출생서류도 찾아볼 겸 해서 방문했는데, 약 두달정도 지내면서 온통 한국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거기는 불법주거침입이나 소음으로 자극하는 사생활침해는 불가능했었는지 밖에서 불빛으로 보내는 신호를 확인했다. 다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곧바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대학때와는 달리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대체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 때도 정신과약에 푹 절어 비몽사몽으로 누워있었는데, 한 간호사가 놀라 내게 뛰어와서는 911 terror사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요즘 유튜브에는 911테러가 자작극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일본 여행, 동남아 배낭여행, 중국 등 여행을 많이 다녔다. 홍콩은 굉장히 비우호적인 느낌이었고, 대만에서는 어느 육교위에서 만난 한 분이 생각난다. 고위 공직자 처럼 보이는 그 분은, 내가 대만에 도착했을 때, 떠날 때 두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마주쳤다. 야시장에 도 갔었는데,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끼다니 이게 웬일인가. 필리핀 보라카이에서는 미국인 생선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상냥하고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여러가지로 불쾌한 일이 많아서 그냥 프랑크푸르트로 훌쩍 떠났었다. 거기서 약 2개월 지내다가 발붙일 데가 없어서, 태국 거쳐서 다시 한국으로. 베트남 호치민시티에서도 고생 많이 했다. 유럽 배낭, 독일 마부르크, 기센, 괴팅엔 등등 많이 돌아다녔다. 내가 한국의 법테두리 밖에 내동댕이쳐져있는 처지가 아니라면 그렇게 많이 해외로 돌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해외 연구자들은 내가 어떻게 버티는지에 대해 이론을 정립하고 싶은가 보다. low profile 어쩌고 하면서도 못 찾는 이유는 아마도 눈에 잘띄지는 않지만 극명하게 드러나는 동서양의 문화차이인 것 같다. 서양문화가 자신을 적극 홍보하며 돋보여야 성공하는 문화라면, 동양은 그렇지 않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다지 연관성이 없으니 생략한다. 좀 덧붙히면, 그 사람들이 나한테서 얻고자 하는 것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기억에 의존하여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나의 말도 안되는 불법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사건만 거의 날림으로 적었다. 이렇게라도 적어서 책처럼 엮어 배포하는 이유는 공식서류든, 사실확인이든 feedback 을 받아서 증거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이 글이 지금은 매우 간략한 메모노트처럼 유료배포 되지만, 재판을 준비하면서 증거와 자료들을 보완하여 version 2로 다시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 자료와 증거를 제공한 분들에게 무료로 보내드릴 것이다. 재판이 끝나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내 상황이 정상적이 되면 version 3으로 좀 더 자세한 감상과 사건 경과와 재판에 대해서 정식출판할 예정이다. Version 2를 받으신 분들은 감사와 보고를 겸해 version 3 도 받으시게 된다. 그때는 사진이나 동영상도 출판에 첨부될 지도 모른다. 홈페이지에서는 이 메모노트가 공개되어 계속 보완될 예정이다. 내가 처한 이 불법사황은 내 사생활 뿐만 아니라 공공생활까지도 불법으로 엿보는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사생활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공권력이 가미된 것이고, 나로서는 증거를 잡아내기가 힘들다. 그 사람들은 나의 사생활과 공공생활 모두를 기록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증거가 5건만 내게 주어져도, 줄줄이 사탕처럼 엮일 것이다. 이게 그냥 한국에서만 꿍꿍이로 끝나는 일이면, 내가 망명이든 이민이든 해외로 나가면 되지만, 상황은 그렇지가 않다. 얼토당토 않게 엉뚱한 사람들이 잘난척하며 손해는 다른 사람들이 입고 이득은 또 다른 사람들이 취하는 아주 이상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그야말로 바보천치와 같은 꼴이다. 미숙하고 서툴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치원생 같은 대처에 낙동강 오리알이라도 된 듯하다. 그런 처지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그 사람들 외에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불법상황인 것이다. 이 메모노트는 2만원에 배포하려고 한다. 이 메모노트에 관련하여 자료와 증거, 서류 등을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고생스러워도, 천편일률로 무양심에 무개념에 야만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어디에선가 눈에 띄지 않게 안타까워하며 가슴 졸이며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이런 꼴을 하고 30년 동안이나 견뎌온 이유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는데, 나는 내 문제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 메모노트를 작성했고, 이걸 토대로 양심적이고 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와 증거, 서류 등’ 을 얻고자 한다. 그와 관련한 내용으로 어떤 형태, 어떤 내용도 좋다. 그런 것을 제공하는 것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일 수도 있고, 본인이 연루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까 말한 대로 이제는 이렇게 쉬쉬하며 자행되는 불법행위는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으며, 그런 자료와 증거, 서류 등을 제공하는 사람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고, 나는 절대로 당신의 뭔가를 희생하면서 억지로 그런걸 제공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나도 정보제공자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제보자가 진실을 드러내고 몰래 불법행위를 하는 무리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도덕적 개체이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분명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제보된 자료와 증거, 서류 등에 값을 매겨 재판이 끝난 후에 지불하려고 한다. 이건 인센티브가 아니고 감사다. 제보할 연락처는 홈페이지 elishahong.net 이메일 elishahong@naver.com 팩스 031-275-8895 휴대전화로(문자만 수신) 010-8629-8865 2부 : 사건별로 정리 생각나는 대로, essay로서 자료와 증거등이 모아지는 대로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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